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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염의 리뷰쓰기/천일염의 드라마 보기

폭싹 속았수다 리뷰 (결말포함, 스포일러 주의)

가장이란 무쇠를 부숴버린 겨울에 대하여.


1. 사실 1,2부 리뷰 작성 당시에도 기재했던 말이지만 공개 전 부터 워낙 말도 탈도 많았던 지라 감상을 망설였던 드라마입니다.

특히나 3부부터는 모배우의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고, 그의 얼굴을 온전히 ‘박충섭’ 이라는 인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드라마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자,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감정선이 스크린을 타고 전해졌고, 어느 순간 저는 더 이상 ‘충섭’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8화부터 마지막 16화까지 쭉 관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식의 곁엔, 항상 애순이 있었죠. 금명이도, 어느덧 훌쩍 자라버린 은명이도. 아이러니하게도, ‘학씨’ 아저씨 부상길도요.

2.

이 드라마는 요즈음 드라마 중 드물게 화려한 연출 없이, 은은하게, 물처럼 스며드는 방식으로 시대를 그려냅니다. 그 흐름에서 관객들은, 빠져나오기 영 버겁습니다.

어쩐지 한 회, 한 회를 볼 때마다 오래된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록 나의 과거는 그 안에 없지만, 제 감정 만큼은 고스란히 함께 하고 있었어요.

3.



무엇보다 극이 3부와 4부에 접어들며 감탄한 건, 부상길 역을 맡은 최대훈 배우의 연기였습니다.

한 배우가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를 연기한다는 건 큰 도전이자 한 편으론 위험이기도 한데, 최대훈 배우는 그것을 감쪽같이 해냈습니다. 말투, 걸음걸이, 눈빛, 그 모든 게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변해가더라고요. 마치, ‘노인이 되어가는 연기’가 아니라 ‘시간을 살아낸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부상길이란 인물은 젊을 적 임신한 아내를 대상으로 가정폭력을 저지르고, 부하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폭력을 서슴치 않았으며, 습관적으로 외도를 하는 둥. ‘좋은 사람’ 이라고 정의 내리긴 조금 복잡한 인물입니다.



한 편으론 ‘관식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시청자들이 있듯, 부상길을 보며 제 아버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마냥 미워하긴 힘든‘ 오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기도 합니다.

3-1.



’부상길‘이라는 이름도 조금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부서지고 상한 길, 부상길. 이렇게 들리지 않나요. ’학씨 아저씨‘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곤 차마 말 못하겠지만, 부서지고 상한 길 ‘부상길’을 끝내 걸어낸 사람이었습니다.

4.

처음엔 금명을 그저 ‘못된 딸’이라 여겼습니다. 제 부모가 저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저를 애지중지 키웠는데. 그런 부모에게 무척 냉정하고, 모난 말만을 내뱉는 딸.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라구요.

특히, 그녀가 예비 시어머니에게 “네 아버지 손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노가다꾼이냐”는 말로 자신의 부모를 비하당한 순간, 바로 파혼을 선언했을 때, 그 결단을 통해 비로소 금명의 마음이 보였습니다.

방법이 서툴렀을 뿐, 결코 금명도 관식과 애순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는 걸요.

4-1.

은명이 관식과 애순에게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것”, “부모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며 독한 말을 내뱉던 장면은, 제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습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제 부모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적이 있어 그랬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단순 미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못내 튀어나온 절규였다는 걸 알고 있기에. 허나 자식이 토해낸 절규는 ’무쇠‘인 부모 가슴에 평생 사무칠 날카로운 창이 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 장면에서 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드라마는 그렇게 자꾸만 저를 제 과거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5. 영범과 금명.


그들은 극 중 관식과 애순 만큼이나 아프게 사랑한 사이였다, 고 생각합니다.

영범은 객관적으로 ‘별로’인 남자입니다. 흔히 말하는 ’마마보이‘인 영범은, 자기보호적이며, 결정적일 땐 제 어머니 등쌀에 금명에게 등을 돌리는 인물이죠.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를 사랑했던 건 분명합니다.


무려 7년이란 시간을 함께했고, 이별에도 1년을 써버린 관계입니다. 끝내 영범이 이별을 받아들이며 건넨 말은,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라, 네가 서울에 아는 사람 나밖에 없지 않느냐” 입니다. 금명은 그런 영범에게, “나의 20대를 기억할 사람이 너라서 다행이다.” 라고 말하죠. 그 말은 분명, 마지막까지 남은 두 사람의 애정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금명은 결코 영범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자신을 내줄 수 없는 사람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걸,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뿐이죠.


6. ‘무쇠’ 양관식

저는 이 드라마에서 관식이라는 인물을, 무쇠 같은 아버지로만 보았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눈물보다는 등으로 보여주는 사랑을 그린 인물.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이었고, 늘 한 발 뒤에서 가족을 지탱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화에서 관식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죽음은 너무도 비극적이었고, 필연보다는 작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죠. 그토록 단단했던 사람을 왜, 굳이 그렇게 보내야 했을까요.

6-1.

관식은 ’무쇠’였습니다. 무쇠는 강하지만, 유연하지 않아 충격엔 매우 약한 금속입니다. 그 탓인가, 드라마는 그리 강하던 관식을, 실은 ‘무쇠는 생각만치 그리 강하지 않은 금속’임을 상기시키듯 이다지 쉽게 파손시켜버립니다.

결말부, 무쇠로 칭해지던 관식의 죽음은 한 개인의 최후이자, 한 시대 ‘아버지’의 상징이 무너지는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한때는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방식으로 버틸 수 없는 시간의 끝.

무쇠는 그저 견디고, 견디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금속이었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저는 무척이나 서러웠습니다. 평생 가족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을, 끝내 아무도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습니다.

6-2.

드라마 마지막회가 끝난 이후, 며칠 내리 ‘가족’ 특히 개중에서도 ‘아버지’ 라는 단어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박해준 배우가 연기한 중년기에 접어 든 관식을 보며 연신 우리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말투도 그렇고, 그 인물이 살아온 방식도 그렇고, 중년의 관식은 꼭 드라마 속 아버지 같았고, 동시에 아버지는 꼭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양관식’ 같았어요. 세상 앞에선 강해 보여야 했고, 가족 앞에선 무뚝뚝했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사람. 그러면서도 금명이 파혼 후 무작정 집밥이 먹고 싶어 본가로 찾아갔을 때, 그 마음을 알아채고 일출 보여준다며 배에 태워주는 사람. 그게 ‘무쇠’ 양관식이었죠.



금명이 관식에게 틱틱대는 장면들을 보며, 저도 아버지께 그리 어리게 굴었던 적이 떠올라서 괴로웠습니다. 마음은 있으면서도, 표현하는 법을 몰라서 자꾸 날을 세우고 괜한 소리를 하던 때가. 배 위에서 관식이 금명에게 해주는 말들, 그 말은 단순히 풀 죽은 딸을 달래기 위한 위로 같으면서도, 인생이라는 바다를 이미 건너본 사람의 인생 조언이었죠.

지금은 아무리 허물어져도, 결국은 다시 돌아오고, 흘러가고, 회복되는 시간들이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너무 우리 아버지 같아서, 괜히 울컥했어요. 마치 화면 속에 있는 게 내 아버지인 것처럼. 금명의 ‘내 아빠 하지마.’ 가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인지 ‘짜증나게’ 알아서.

관식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말로 사랑을 고백하지는 않지만, 배에 타서 보는 일출, 그러한 방식으로 제 마음을 보여주는 사람. 무쇠처럼 단단하고 거칠지만, 그 안에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숨기고 있는 사람.

그런 관식을 보며,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못다 한 말들을 마음속에서 조용히 꺼내보게 되었습니다. 미안했고, 고마웠고, 그래서 더 그리운 마음들을.

7.



가족이란 존재는 어쩌면, 서로를 지키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가장 가까운 존재가 가장 외로울 수도 있다는 것. 이 드라마는 그것을 여과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폭싹 속았수다’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모든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고 상처주고, 외면하고 지키려 했던 그 수많은 순간들이 쌓여서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룹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며 나의 부모를, 나의 과거를, 그리고 나의 사랑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폭싹 속았수다,

그 안에는 진짜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오래 남아요. 우리가 끝내 말하지 못했던 말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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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1. 감명주 배우님, 좋은 연기 감사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