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악연 리뷰 (약스포일러, 매우 주관적인 감상 주의)
넷플릭스 드라마 ‘악연‘은 서막부터 결말까지 차갑고 집요한 이야기이다. 총 여섯 인물이 주연으로 등장하며, 어떻게 살아도 결국 서로를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들의 지독한 악연.
‘악연’은 그들 사이 흐르는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6부작의 이야기로 보여준다.
0.
‘악연’의 인물들은, 서로 무관해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과거 사건을 매듭처럼 공유하고 있다. 과거의 학교폭력, 성폭력, 방관, 복수, 선택, 침묵.
6명의 등장인물들은 그저 단순하게 얽힌 게 아니라, 서로를 망가뜨린 채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관계를 우리는 ‘인연’이 아닌 ‘악연’이라 지칭한다.
1.
김범준(박해수)은 우연히 살인을 목격하고, 이를 은폐하려 한 선택으로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리는 인물이다.
외과의사 이주연(신민아)은 과거의 끔찍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박재영(이희준)은 빚더미 속에서 허덕이는 인물이다.
장길룡(김성균)은 생계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침해하고, 한상훈(이광수)은 안정된 삶을 살던 중 연인 이유정(공승연)과 함께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 인물들 사이에서, 드라마는 묻는다.
“당신은 정말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까?”
1-2.
드라마는 인물들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진행되는 실수와 각종 범죄로 연결된 인물들이 얽혀드는 구조로 진행된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주연과 정민을 제외한) 등장인물 중 ‘온전한’ 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이미 ‘악연’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수사가 아닌, 운명처럼 씌워진 덫, 혹은 운명의 저주처럼 느껴진다.
2.
이 드라마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극 중 ‘주연’이 겪는 강간 장면. 나는 그 장면에서 트리거가 눌렸다.
몸이 반응했다. 절로 숨이 턱 막혔고, 눈물이 차오르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해당 장면은 지나칠만치 현실적이었고, 노골적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건 단순한 ‘사건의 재현’이 아니었다. 기억의 재생, 혹은 강제적인 소환이었다.
주연의 강간 묘사가 생각보다 노골적이지 않았단 시청자들도 있었지만 내게는 끔찍했고, 불편했고, 그다지 괴로웠던 연출이었다.
그러한 평가들을 찾아보며 나만 유독 예민한가, 나만 너무 반응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이내, 깨달은 것은 그 당시 내가 통감한 것은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기억하는 사람의 감각이라는 것이다.
2-1.
그럼에도 나는 이 드라마를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감상에서, 나는 다른 부분에 가닿았다.
내가 이 작품을 끝내 외면하지 못한 건, 여섯명의 주연들이 하나의 ‘악연’으로 지독하게 얽혀있다는 걸 증명해낸 연출 덕이자, 그 안에 담긴 다른 ‘악연’ 때문이다.
3. 드라마가 말하는 수많은 ’악연‘ 중에선 주연과 정민의 ‘악연’도 존재한다.
주연은 ’그 사건’ 이후 오래도록 침묵하며, 끝없이 무너지는 인물이다.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분노를 쌓아가며 살아간다. 그런, 그 곁에는 정민이 있다. 그가 주연의 과거를 알게 되었을때, 그는 단 한마디를 건넨다.
“미안하다.”
그 말은 ‘내가 그랬다면 어땠을까’ 식의 상상이나, ‘내가 대신 복수할게’라는 과잉된 정의감도 아니다. 그건, 그녀가 그렇게 오랜 시간 홀로 견뎌왔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이다. 그 순간 정민이 떠올린 건, 그녀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감당이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 방식은, 그녀의 고통을 중심에 두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나에게도 도달했다.
3-2.
정민은 결국 주연을 위해서 제 손으로 복수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그 선택은 단지 정의 구현의 서사가 아니다. 그건 그녀가 더는 자기 자신을 갈기갈기 찢지 않도록, 더는 지옥을 저 홀로 견디지 않도록,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그녀를 탈출하게 하려는 마지막 방식의 사랑이었다.
내가 그 장면에서 울컥했던 건, 그게 단순한 영웅적인 서사여서가 아니라, 그것은 깨나 자기 파괴적인 결단이며, 동시에 그녀를 구원하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나마 그녀의 고통을 짊어지려 했고, 자신이 무너지면서 그녀를 살아남게 하려 했다. 사랑은 그렇게, 때로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 드라마가 더 깊고 무거운 건, 극 안에서 ‘악연’이라는 말이 단지 누군가와의 불쾌한 과거가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연루,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 덮을 수 없는 상처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 안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선택하고, 서로를 바라본다.
4.
당장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인, ’살인자ㅇ난감‘ 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강간을 소재로 다루지만 나는 해당 장면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연출이 훨씬 더 건조했고, 감정의 밀도가 덜했기 때문이다. 그건 이야기 속 장치였지, 기억을 건드리는 키는 아니었다.
하지만 ’악연‘은 다르다.
피해자가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하고, 가해자가 ’여전히 피해자를 위협할 수 있을 듯‘ 구는 모습을 보이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흘러가는 그 서늘한 풍경 안에서, 나는 나의 과거와 지금을 동시에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사랑이 등장한다. 어느 누구보다 잔혹한 삶을 견디고 있는 이들 사이에 서툰 손길, 조심스러운 위로, 끝끝내 둘 중 하나가 망가지는 선택으로 나타나는 사랑.
5.
’악연‘은 그렇게 사랑과 죄, 피해와 가해, 복수와 책임, 고통과 연민이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나는 끝내 이런 질문을 남긴다. 나는 누군가의 지옥에 함께 내려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은 고통을 끌어안는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끝에서 도망치는 것인가.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이, 결국 구원일 수 있는가.
‘악연’은 끝까지 불편하고, 심히 불쾌하다. 그러한 양가성 때문에, 나는 이 드라마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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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1. 이희준 배우, 박해수 배우, 공승연 배우등 좋아하는 배우들이 많이 출연해서 드라마 자체는 즐겁게 보았습니다. 다만 지적한 강간씬이 제 기준 너무 노골적이었던지라, 먀냥 호평하긴 어려운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든 인물들이 ‘악연’으로 얽혀있단 점에서는 깨나 흥미로운 드라마였습니다.
여담2. 실은, 이 드라마를 보며 오래 전 보았던 영화 ‘ㅇ공ㅇ’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당 영화 역시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조명한 영화였지만 지금에 와선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남기죠.
뒤늦게 알려진 바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피해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폭력 연출의 노골적인 묘사가 과연 ‘감독이 무엇을 시사하려고 했는가’를 곱씹게 유도하죠. 해당 작품도, 첫 감상시 깊은 불쾌감과 이물감을 느꼈는데, 관객에게 ‘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설명하고자’ 했다면서, 어째서 피해자의 존엄은 존중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여담3. 단순 ‘트리거 요소’ 피해가세요. 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연출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걸까,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전에 청설 리메이크판 리뷰때, 혹평 리뷰는 어지간하면 안 쓰겠다고 했었는데. 드라마 자체는 좋았어요. 그저 위에서 연신 지적한 ’불필요한 폭력씬’이 유독 거슬리고 아쉽다... 정도입니다.